대한민국 사람이라면 거의 예외 없이 면을 사랑한다.
나도 물론 그 대열에 들어간다.
일본 라면도 세계적으로 유명하지만
내가 보기에 한국 인스턴트 라면과 일본 라면은
엄연히 다른 종류의 음식이다.
우리에게 라면이란 출출할 때,
냉장고를 열었는데 딱히 먹을 게 없을 때,
그냥 대강 끼니를 때울 때 꺼내는 일종의 생존 식량이다.
반면 일본 라면은 정성스럽게 차려놓은 정식처럼
격식이 있는 한 끼 식사에 가깝다.
물론 일본 라면도 맛있다.
하지만 신라면 특유의 칼칼하고 시원한 그 맛은
어디에서도 찾기 어렵다.
일본에도 모우코탄면(蒙古タンメン)처럼
매운맛으로 유명한 체인이 있고
편의점이나 일반 마트에서도 관련 제품을 살 수 있을 만큼 유명하다.
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맛은 별로다.
맵긴 하지만 국물이 진하지 않고
야채를 많이 넣어 깊이가 없다.
신라면처럼 맵고 시원하면서 깊은 풍미가 없다.
결국 나는 일본 가게에서 한 그릇에 만 원 하는 라면보다
가격도 저렴하고 맛도 훨씬 익숙한
한국 인스턴트 라면이 역시 최고라는 결론에 다다랐다.
초등학교 4학년, 면을 끊게 만든 그 사건
그런 내가 면을 전혀 입에 대지 못했던 시절이 있다.
원래부터 싫어했던 것이 아니라
어느 사건을 계기로 꼬박 3년을 면과 담을 쌓았다.
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.
같은 반 여자아이가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두 마리를 학교에 데려온 날이었다.
털이 복슬복슬한, 지금 말로 하면 일명 “똥개”이었는데
태어난 지 얼마 안 된 터라 무척 귀여웠다.
쉬는 시간에 반 아이들이 몰려들어 함께 구경하던 중
강아지 한 마리가 갑자기 구역질을 시작했다.
나는 그저 무심하게 지켜보고 있었다.
그러더니 강아지 입에서 뭔가가 흘러나왔다.
기생충이었다.
길이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
그 모양이 당면과 너무 흡사했다.
잡채에서 가끔 굵기가 유독 다른 면이 하나 섞여 있을 때 있지 않은가.
바로 그 굵기였다.
그날 이후 3년 동안 당면은 입에 댈 수가 없었다.
라면도 거의 먹지 못했다.
면을 볼 때마다 강아지 입에서 흘러나오던 그 장면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.
중학교에 올라가서야 조금씩 다시 먹을 수 있게 됐다.
트라우마가 시간에 녹아들었는지
아니면 면을 향한 욕망이 기억을 덮어썼는지
그 경계는 지금도 모르겠다.
수십 년이 지난 지금은 당면을 봐도 그날이 떠오르지 않으니
다행이라면 다행이다.
10대와 20대, 라면 전성시대
중학교부터 다시 불이 붙었다.
매운 음식을 특히 좋아하던 시절에는
두세 달 동안 거의 매일 라면을 끓여 먹은 적도 있었다.
청양고추와 표고버섯을 넣기도 하고
남은 콩나물국, 미역국, 된장국, 김치찌개에
라면 사리를 넣어 끓여 먹기도 했다.
지금 생각해도 그게 꽤 맛있었다.
그렇게 10대 후반과 20대를 보냈다.
30대 중후반, 몸이 먼저 신호를 보냈다
평화로운 면 생활에 다시 경고등이 켜진 건 30대 중후반이었다.
라면을 먹으면 어김없이 설사를 했다.
처음에는 무슨 병이 생긴 줄 알았다.
젊은 나이에 대장내시경까지 받으러 갔다.
결과는 이상 없음이었다.
의사 선생님은 알레르기성 반응이라고 하셨다.
그때는 “나한테 알레르기 같은 건 없는데”라고 의아하게 생각했지만
지금 돌아보면 너무 오랫동안 너무 자주 먹어서
몸 안에 조금씩 알레르기가 쌓인 것 같다.
일본에서 봄마다 기승을 부리는 삼나무 꽃가루 알레르기와 비슷한 원리다.
처음에는 아무 반응이 없다가
일정 기간 누적되면 어느 시점부터 증상이 터져 나온다고 한다.
내 몸과 면의 관계도 그랬던 것이다.
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정보가 넘치지 않아서
의사 말 외에는 원인을 찾을 길이 없었다.
지금은 안다.
원인은 글루텐이었다.
글루텐 프리, 시작해보니
우리가 먹는 면 중에서 베트남 쌀국수나 잡채에 들어가는 당면을 제외하면
거의 전부가 글루텐을 포함한 밀가루 면이다.
이제는 글루텐 프리 제품도 늘고 있고
전문 식당도 생기고 있다.
서양 국가 마트에서는 꽤 다양하게 찾을 수 있다고 하는데
국내에서는 아직 드문 편이다.
결국 나는 글루텐 프리 식생활을 시작했다.
100%는 아니다.
최대한 피하는 것을 목표로 하되
일주일에 한 번은 치팅 데이로 허용하고 있다.
인스턴트 라면 대신 당면을 먹고
과자와 빵은 아예 손을 대지 않는다.
밀가루 음식 전반을 최대한 멀리하는 것이다.
시작한 지 두 달 정도가 됐다.
인스턴트 라면을 먹지 못하는 것만 아쉬울 뿐
나머지는 생각보다 견딜 만하다.
밀가루를 끊으니 화장실에서 개운하고
입 냄새도 줄었고
몸에서 크고 작은 좋은 변화들이 느껴진다.
이 생활을 그만둘 생각은 지금으로선 없다.
결국 나이가 들면 먹는 게 전부다
젊을 때는 자극적이고 맛있는 것만 찾았다.
하지만 몸이 먼저 말을 걸어오는 나이가 되고 보니
무엇을 어떻게 먹느냐가 삶의 질을 가장 빠르게 바꾼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.
인생도 결국 다 비슷한 것 같다.
나이가 들수록 자극보다는 건강을,
속도보다는 지속을 선택하게 된다.
면도 그렇고, 아마 많은 것이 그럴 것이다.